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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냥의 올바른 맥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승하는 한국민속매사냥보존회

매사냥소개 FALCO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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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ne call 063-433-6760 평일 오전 09:00 ~ 18:00

Location

(우55453)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임진로 1342

매사냥의 역사

선사시대

우리 겨레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전기 무렵까지 주로 사냥에 의지해서 생존을 이어갔다. 당시의 인구 가운데 노약자와 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전업 사냥꾼이었다. 좁은 국토에 비해 산이 많은 지리적 환경도, 사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요인이었다.


구석기시대

자연동굴이나 큰 바위 그늘에 살던 구석기시대(60만~40만 년 전)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사냥구가 따로 없었다. 작은 짐승은 가까이 다가가서 몽둥이로 후려치거나 돌멩이를 던져 잡았다. 사슴 같은 큰 짐승은 여럿이 큰 소리를 지르며 절벽으로 몰아가서 그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멧돼지, 들소, 사슴 따위는 구덩이로 유인하거나, 앞이 막힌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고 몽둥이나 돌로 때려잡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오는 중간 단계(중석기시대)에 이르러 사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동물의 힘줄로 줄을 맨 활의 등장이다. 이로써 짐승에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위험이 사라졌다. 꿩이나 기러기 따위의 날짐승 사냥도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사냥에 개를 이용하게 되면서 사냥의 효과는 더욱 높아졌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서기전 8000년~서기전 6000)에는 돌활촉을 비롯해서, 짐승의 뼈나 뿔 또는 이빨로 만든 뼈 활촉도 나왔다. 돌도끼도 사냥구로 이용하였다. 주거지도 조개류나 물고기가 풍부한 강가나, 가까운 언덕으로 바뀌었다. 뼈를 갈아서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 바늘이 나타나면서 사냥의 비중도 점점 낮아졌다. 이 시기의 적지 않은 유적에서 고래, 바다사자, 돌고래 따위의 물고기 뼈가 출토된 것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돌창의 등장도 사냥에 변화를 가져온 요인의 하나이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몰이사냥, 함정사냥 외에 덫사냥, 창사냥, 활사냥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물사냥도 등장하였다. 한편, 멧돼지나 사슴 사냥은 고기를 얻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화살촉을 비롯해서 송곳이나 바늘 따위의 연모를 만드는 데에도 긴요하였다.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 따위의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동물의 뼈가 많이 나온다. 이는 중요한 생존수단이 사냥에서 농업으로 옮아간 것을 알려주는 증거의 하나이다. 매사냥도 자주 벌였는데, 이 시기에 사냥 대상이 많이 늘어난 것은 사냥 방법이 그만큼 다양해진 것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단궁(檀弓)과 표범 가죽, 부여의 돼지가죽, 살쾡이가죽, 곰가죽은 주변 국가에 널리 알려졌다.


고구려

고구려에서는 사냥을 군사 훈련의 하나로 삼았다. 고구려의 사냥 모습은 무용총 수렵도 등의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말을 탄 사냥꾼이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을 활[短弓]로 쏘아 잡는 모습을 그린 무용총의 것이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해마다 삼월 삼짇날 낙랑(樂浪)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날 왕과 함께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 갔다."-권제45 열전 제5 「온달」

덕흥리고분과 무용총, 그리고 수산리고분벽화를 비롯한 여러 고분벽화에 잘 드러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일찍부터 매나 개를 이용하는 사냥을 즐겼다. 장천1호고분을 비롯해서 안악1호분묘에 그려진 매사냥 장면이 이를 알려준다. 더구나 태조왕 69년(121) 10월에는 숙신(肅愼)에서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고구려 임금의 매사냥이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특정한 지역에 왕실 전용 사냥터를 마련해 두었다. 기산(箕山)에서 사냥하였다는 기사가 여섯 차례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백제

백제 임금의 사냥 목적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이었으며 또한 사냥을 통해 종묘와 산천제물에 쓸 제물을 얻었다. 그리고 사냥 방법이나 기구도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다.

백제 임금 가운데 매사냥을 크게 즐긴 이는 아신왕이다. 원년(392) 기사에 “말을 타고 달리기와 매사냥을 좋아하였다”고 적혀 있다.

사냥을 즐긴 다른 임금과 달리 법왕은 원년(599) 12월에 살생을 금지시키는 한편,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거두는 사냥구까지 태워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백제에서 서민들도 매사냥을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무왕은 33년(632) 7월에 생초(生草,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벌판에서 사냥을 벌였다. 그 사이에 금령이 풀렸던 것이다.

사냥 기간이 고구려에서는 주로 봄과 가을에 집중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백제에서는 여름과 겨울에도 벌였다. 7월이 5회이고, 12월, 1월, 2월이 각 1회씩이다. 특히 백제에서 매사냥을 일본에 전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다음은 『일본서기』 의 내용이다.

진토쿠[仁德] 천황 43년(355) 9월 1일, 의망둔창(依網屯倉)의 아이고(阿餌古)라는 사람이 이상한 새를 바치며, “제가 늘 그물로 새를 잡아왔지만, 이것은 일찍이 못 보았습니다. 매우 드문 새인 까닭에 바칩니다”고 하였다. 천황은 (백제의 왕족인) 주군(酒君)을 불러 “이것이 무슨 새인가?” 물었다. 그는 “이러한 새는 백제에 많습니다. 길을 들이면 사람을 잘 따르며, 빨리 날아가서 여러 새를 잡습니다. 백제에서는 구지(俱知)라고 부릅니다” 고 대답하였다. 천황은 새를 그에게 주며 “길을 잘 들이라”고 일렀다. 주군은 새를 훈련시킨 뒤, 다리에 가죽 끈을 매고 꼬리에 작은 방울을 달아맨 다음, 팔뚝에 얹어서 천황에게 바쳤다. 이 날 천황은 백설조야(百舌鳥野)로 가서 사냥을 하였다. 암꿩이 많이 나는 것을 보고 매를 놓았더니, 잠깐 동안에 수십 마리를 잡았다. 천황은 매우 기쁜 나머지 응감부(鷹甘部)를 두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부터 매를 기르고 사냥을 전담하는 부서를 응감읍(鷹甘邑)이라 불렀다.

매사냥을 우리가 일본에 전한 사실보다, 다리 사이에 가죽을 채우고 꼬리에 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 방울은 매가 꿩을 챈 자리를 알려 주는 구실을 한다. 오사카에는 주군의 무덤과 묘비가 있으며, 그 부근에 그를 신으로 받드는 신사(鷹神社)도 있다. 한편, 『이가풍토기(伊賀風土記)』에도 “이가군(伊賀郡) 후지미다케(不盡見嶽)는 주군(酒君)의 장례를 치른 곳으로 그를 ‘매사냥의 신(鷹見之神)’으로 부른다”고 적혔다. 이가(伊賀)는 오늘날의 미에현(三重縣) 북서부의 쓰게(拓植) 강변을 이른다.

또 『섭진지(攝津志)』에 따르면, 응감부의 위치는 세쓰스미요시군(攝津住吉郡)의 응합촌(鷹合村)이며, 그곳에 ‘평무덤[平塚]’이라고 불리는 응감부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 세쓰는 지금의 오사카부[大阪府] 북부에 있는 주택 및 공업도시이다. 그 뒤 백제에서는 매와 개까지 일본에 보내주었다.

다음은 사가(嵯峨)천황(810~823)의 명에 따라 편찬된 『양응기(養鷹記)』의 기사이다.

진토쿠[仁德]천황 46년(359), 백제의 사신이 매와 개를 우리나라에 가져왔다. (중략) 매를 먹이는 사람을 ‘미광(米光)’, 개를 먹이는 자를 ‘수광(袖光)’, 개를 흑반(黑斑)이라고 불렀다. (중략) (백제의 사절을 맞이하러 갔던) 정뢰미광(政賴米光)이 매사냥 법을 곧 익혀서, 매를 팔뚝에 얹고 개를 앞세워 궁궐로 돌아왔다. 이를 기뻐한 천황은 상을 내리고 채읍(采邑)까지 주었다. 오늘날에는 매사냥을 ‘지호(指呼)’라고 부르며, 이는 오로지 그(政賴)가 가르쳐준 것이다. 그의 후손의 대가 끊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매뿐만 아니라, 개까지 보내주고 사냥 법까지 일러주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편, 『하리마풍토기(播磨風土記)』에는 이호군(揖保郡)의 스즈노미오카(鈴喫岡)의 유래에 대한 기사가 있다. 오닌[應仁]천황이 매사냥을 하던 중에 매의 꽁지에 달았던 방울을 잃었고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던 데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로써 당시에는 이 방울이 귀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백제에서 만들어서 가져왔을 것이다.


신라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의 사냥 관계 기사는 12건이며, 이에 관련된 동물과 그 빈도는 다음과 같다,

개(13), 호랑이(10, 범 1 포함), 여우(9), 꿩(6), 매(5), 사슴(5), 표범(1)

지마왕은 원년(112)에 태자와 함께 유찬 못가에로 가서 사냥하였다. 연못가에서의 사냥이므로 날짐승을 잡았을 것이다. 눌지왕 18년(434) 9월에 백제에서 흰 매를 보냈다. 그리고 12년(441) 2월에는 사물현(史勿縣,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소지왕 18년(496) 2월에는 가야국에서 흰 꿩을 바쳤다. 고구려나 백제처럼, 새 앞에 붙인 ‘흰’이라는 말은 ‘상서롭거나 특별한 새’라는 뜻이다.

문무왕 17년(676) 3월에는 소부리주(所夫里州,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성덕왕8년(709) 5월에는 청주(菁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흰 매를 바쳤다. 그리고 같은 왕 19년(720) 5월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같은 해 7월에는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원성왕 9년(793) 8월에는 김뇌(金惱)가 흰 꿩을, 소성왕 원년(799) 3월에는 냉정현령(冷井縣令) 염철(廉哲)이 흰 사슴을, 같은 해 7월 한산주(漢山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서는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2년(655) 10월에 우수주(牛首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와 굴불군(屈弗郡,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에서 각각 흰 사슴(白鹿)과 흰 돼지를 바쳤다. 성덕왕 14년(715) 3월에는 흰 참새도 들어왔다. 이들이 모두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짐승인 점은 고구려나 백제와 같다.

혜공왕 4년(768) 6월에는 궁성 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놓쳤다. 성덕왕은 705년(성덕왕 4) 9월에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법흥왕 때의 금령이 유명무실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8년(709) 3월에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진상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22년(723)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과하마(果下馬) 한 마리, 해표 가죽, 우황, 인삼, 다리,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금, 은 등과 함께, 매 무늬를 놓은 방울(鏤鷹鈴)을 선사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매사냥이 얼마나 성행되었던 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애장왕 2년(801)과 3년 그리고, 헌덕왕 2년(810)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 삽량주(揷良州,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서주(河西州,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읍) 등지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신라에 관한 사냥 기사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도 흰 매와 흰 꿩을 바쳤다는 기사가 주류를 이룬다. 신라에서 매사냥이 성행된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보기이다. 실제로 지증왕(500~514)은 매사냥의 달인이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증손 김후직(金后稷)이 이렇게 아뢰었겠는가?

전하께서는 날마다 건달들과 포수들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서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해 산과 들로 뛰어다니는 것을 자신이 막지 못하십니다. 노자는 “사냥에 정신이 팔리면 마을을 걷잡지 못한다”고 일렀습니다. 또 『서경(書經)』에도 “안으로 계집에 미치거나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이 중에 한 가지에만 마음이 팔려도 망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적혔습니다. 그렇다면 사냥이라는 것은 안으로는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고, 밖으로는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명심하소서(권제45「열전」제5).

더구나 문무왕은 하루에 서 말 쌀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리고 경신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을 거르고 아침 저녁 두 끼만 들었음에도 쌀 열 말, 술 열 말, 그리고 꿩 열 마리를 먹었다(『삼국유사』권제1 「태종 춘추공」). 당시에는 매사냥을 전담하는 관리가 있었을 것이다.

선도산에서 매사냥을 하던 경명왕(917~924)이 매를 잃고 “찾으면 반드시 성모(聖母)께 벼슬을 드리겠습니다” 빌었더니, 과연 매가 돌아왔다. 왕은 약속대로 대왕(大王) 자리를 바쳤다(『삼국유사』 권제5 감통 제7). 매를 귀물로 여긴 것이다.

신라에서 매를 이와같이 영물(靈物)로 다룬 것도 흥미롭다. 『삼국유사』 의 두 기사 내용이다.

신문왕 2년(683) 재상 충원(忠元)은 한 수알치(매를 부리면서 매사냥을 지휘하는 사람. 현대에서는 수할치)를 만났다. 꿩은 금악(金岳) 너머로 날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사냥꾼이 방울 소리를 따라 가자, 매는 어떤 우물가 나무에 앉았고, 우물에 갇힌 꿩은 두 날개로 새끼 둘을 품은 채 떨고 있었다. 매는 꿩을 가엽게 여겼던지 채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충원이 돌아와 임금에게 알리자, 그곳에 영취사(靈鷲寺)를 세우게 하였다(권제3 「탑상」 제4 영취사).

진평왕(眞平王, 579~632) 때,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혜공(惠空)은 어린 적에 주인의 종기를 고쳐주었다. 그는 천진공의 매도 잘 돌보았다. 천진공이 그 매를 지방으로 떠나는 아우에게 주었다가 불현듯 보고 싶어하자, 그는 곧 가져다 바쳤다. 그제서야 천진공은 혜공이 보통 성인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제4권 「의해(義解)」제5 이혜동진(二惠同塵)).


발해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에서도 사냥이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발해의 남자들은 꾀가 많고 용감해서 셋만 모이면 호랑이를 잡는다”고 적혀 있다(권 11「세기 발해」). 특히 호랑이 사냥이 빈번했던 것이다.

발해에서 739년 7월과 872년 5월, 일본에 호랑이 가죽 열 장, 표범 가죽 여섯 장, 곰 가죽 일곱 장을 보냈다(『속일본기(續日本記)』 권13 「성무기(聖武紀」천평 11년 12월 무진). 이로써 발해 사람들이 사냥을 매우 활발하게 벌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727년에 일본에 수달피 가죽 300장을(『속일본기』 권10 「성무기 신구 5년 정월), 738년에는 당나라에 돼지가죽 1000장을 수출하였다(『발해국 지장편』권3 「문왕 대흥」원년 8월).

발해에서 779년까지 해마다 당나라에 매를 보낸 사실도 돋보인다. 그리고 824년 3월에는 일본에 사냥개도 보냈다(『신당서』「덕종」 즉위년 윤 5월). 매사냥은 물론이고, 개사냥도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우리 개의 우수성이 일본에도 알려진 사실을 뒷받쳐 주는 셈이다.


고려

“고려시대의 사냥은 매사냥뿐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역대의 임금들은 매사냥을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후기에 이를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원나라와의 빈번한 접촉에 따른 결과이다. 『고려사』의 기사를 바탕으로 당시의 사냥을 살펴보면,『고려사』의 사냥 관계 기사는 모두 206건이다. 이 가운데 매에 관한 것이 124건이고, 매사냥은 3건, 응방(鷹坊) 44건, 홀치 1건이다. 사냥에 관련된 짐승과 빈도는 다음과 같다.

개(12), 호랑이(10), 돼지(5), 여우(5), 사슴(5), 노루(3), 표범(2), 곰(1), 꿩(1)


조선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사냥 관계 기사는 모두 2417건으로, 이 가운데 건수가 가장 많은 임금은 세종(474), 성종(348), 중종(267), 연산(264), 세조(260), 선조(164) 순으로 이어지며, 나머지 임금은 모두 50회 미만이다. 강무(講武)를 비롯해서, 임금이나 귀족들이 즐긴 매사냥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종묘 등의 제례에 쓸 제물을 얻거나, 중국 사신 접대, 그리고 호랑이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사냥도 벌였다. 특히 종묘에는 제삿일이 아니더라도, 잡은 짐승을 사냥터에서 바로 바치는 일이 잦았다.


심신단련의 수단

심신 단련을 위한 사냥의 본보기는 신라 진흥왕(540~576) 대에 공인된 화랑도에서 찾을 수 있다. 15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3년 동안, 경주 남산을 비롯해서 지리산과 금강산 등으로 다니며 무술을 익히는 한편,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겼다. 풍류도(風流徒) 또는 국선도(國仙徒)라는 별명은 이에서 왔다.

고려시대의 임금 가운데에도 심신 단련을 위해 사냥터에 나선 사람이 적지 않다. 매사냥을 매우 즐긴 공민왕은 신하들이 만류하자, “사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의 사나운 성격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금의 놀이 사냥을 ‘유렵(遊獵)’이라고 따로 표현하였다. 이에 관한 기사는 19건으로, 성종이 7건이고 태종이 4건, 그리고 숙종이 2건이다. 나머지는 정종, 단종, 세조, 연산, 중종, 명종 등이 각 1건씩이다.

정종은 원년 9월 10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해주로 사냥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도 같은 곳으로 가면서 “내가 오래된 병이 있어서 가는 것이니 막지 말라”고 일렀다(2년(1400) 9월 19일). 그리고 10월에도 “내가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한 탓으로 병이 났다. 한 번 나가서 울울하게 맺힌 기운을 풀려고 한다”며, 신하들의 만류를 물리쳤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태종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구중궁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 (중략) 무가(武家)의 자손이다. 어려서부터 오로지 말을 달리고 사냥하는 것을 일삼았는데, 지금 왕위에 있으니 할 일이 없어 (중략) 재미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용하고 편안한 여가에 어찌 놀며 구경하고 싶은 뜻이 없겠는가?"(3년(1403) 10월 1일)

영명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도 신하들의 만류를 여러 번 뿌리치고 사냥에 나섰다. 원년 3월 7일에 강원도 철원 등지로 떠날 때 사간원에서 반대 상소를 올리자, “이번 사냥은 군사 훈련도 아니고, 농민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왜 막는가?” 하며 화를 냈다. 사간원에서 다시 “그렇다면 더욱 명분이 없는 거둥이니 그만두어야 합니다”고 막았지만, 듣지 않았다. 그가 매사냥 구경을 자주 나섰던 것도, 보통 때 쌓인 울적한 심정을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많은 임금들의 사냥 구경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세조의 경우, 재위 14년 동안의 사냥 관계 기사는 무려 148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은 서너 번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구경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해 열 번 이상 나선 셈이다. 그가 이처럼 빈번하게 거둥한 것은 조카 단종과, 자신을 반대하는 여러 신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마음의 괴로움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단종과 세조대에는 지방의 수령이 군졸들을 이끌고 유렵을 즐기다가 벌을 받았다. 이러한 폐단은 매우 극심했던 모양으로, 성종은 지방으로 떠나는 관리에게 유렵을 즐기지 말라는 당부를 세 차례나 하였다. 앞에서 든 유렵 통계 가운데, 임금의 사냥에 관한 기사는 세조대의 것이 마지막이다.

근래에는 심신단련을 위한 사냥을 ‘스포츠 사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양식 사냥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초기에 서양식 총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일부 경제적 여유를 지닌 특수층의 오락에 지나지 않았다. 스포츠 사냥이 전국으로 퍼진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성능 좋은 총포와 개가 자유롭게 수입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스포츠 사냥이 낳은 부작용 또한 적지 않다. 한때 야생동물의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을 한 것이 좋은 보기이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10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를 금렵기간으로 정하는 등 야생돌물 보호에 힘쓰고 있지만 밀렵꾼이 워낙 극성을 부려서 효과가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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